2007년 11월 27일 아침.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이 주최하는 ‘단속·추방 반대집회’에 참석하러 집을 나서던 까지만 이주노조 위원장, 마숨 이주노조 사무국장이 불법 연행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집 주변에 잠복해 있던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은 영장도 없이 이들을 연행하면서 까지만 위원장에게는 수갑까지 채웠다. 비슷한 시각, 직장에 출근해 있던 라주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도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직원들 앞에서 ‘개 끌려가듯’ 끌려갔다.
이주노조활동으로 표적수사, 강제출국 당해
모니르우즈자만 마숨씨가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은 1996년 5월. 현지 브로커에게 1000만원을 주고 어렵게 구한 한국 일자리이기에 만삭인 아내를 뒤로한 채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첫 직장은 서울 장안동에 있는 섬유공장이었다. 원단 절단공으로 일했던 마숨씨는 망치와 스패너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사장에게 맞았고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국인 동료들에게도 맞았다. 이슬람교에서는 음주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였던 마숨 씨는 문화 차이를 인정받지 못한 채 맞고만 있어야 했다.
공장에서는 ‘마숨씨’가 아니라 ‘머슴’으로 불렸다. ‘개새끼’라는 말도 들었다. 둘 다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그는 다른 한국인 동료에게 ‘개새끼’라고 했다가 또 맞았다. 그것들이 비속어인 것은 하루 12시간의 일이 끝나고 매일매일 4~5시간 씩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국어를 익힌 후에나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공장 책임자도 될 수 있었지만 ‘불법 체류자’라는 핑계로 6개월치 봉급을 뜯긴 채 해고당했다. 이후 그는 취직과 해고를 반복하며 비인간적인 대우와 임금체불 등에 ‘닥치고’ 있어야 하는 현실을 겪었다. 그리고 이주노조에 가입했다.
그는 이주노조 활동을 하면서 이주노동자 정책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불합리한 정책과 사건들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표적 수사와 강제 출국이었다. 그는 2007년 11월 연행 후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청주보호소에 갇혀 있다가 12월 13일, 한국정부당국에 의해 강제로 출국 조치됐다.
학교대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방글라데시 아이들
대부분의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운명이다. ‘코리안 드림’은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뺏었다. 그러면서도 이들 없이는 산업근간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이주노동자들에게 꿈을 주었다가 빼앗는 것을 반복한다. 석권호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 국장은 “매일 터지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추방에 대응하다보니 끝이 없더라”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을 회상했다. 석 국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및 이주노조 활동가들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했다. 마숨씨처럼, 한국에서 이주노조활동을 하던 활동가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서도 그들의 열정과 활동 펼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석 국장이 2008년부터 4차례에 걸친 마숨의 나라,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교육사업이었다. 석 국장이 마숨을 만나러 처음으로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 수도 다카에 도착해 택시를 타면서 텔레비전에서 보던 아이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그늘에서 쉬던 아이들이 외국인으로 보이는 석 국장에게 달려들어 돈을 구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택시가 출발하려는데도 차에 매달려 돈을 줄 때까지 가지 않을 태세였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석 국장을 마숨씨가 말리고 나섰다. “이 아이들은 (폭력)조직과 연결되어 있다. 조직에 상납하므로 당장 몇 달러를 준다고 해서 아이들의 생활이 나아질 것이 없다.”
다카에서의 볼 일을 끝낸 석 국장은 7시간을 차로 달려 마숨씨의 고향 마을인 보리샬에 도착했다. 잦은 침수와 빈곤으로 생활은 낙후됐지만 주민들은 미소로 석 국장을 맞이했다. 놀라운 것은 미취학 아동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보리샬 아불깔람대학교의 부총장인 모하메드 하룬 울 라쉬드씨는 “이 지역 아이들은 절대적 빈곤 때문에 벽돌공장, 릭샤운전 등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취학연령아동 중 50%에 해당하는 750여 명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애초부터 제공되지 않는다”고 했다.
가난한 부모의 자녀는 유전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학교대신 일터를 택했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고 가난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 요소였다.
석 국장은 방글라데시를 몇 번 더 다녀와 “이 지역에 대한 교육사업을 하자”고 주변 간부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추방된 이주노동자들이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 지역 발전까지 모색할 수 있다는 의의도 설명했다. 이 가운데 마숨씨 같은 사람들이 소통의 중간자로서, 마을 네트워크의 허브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동의한 주변인들 중엔 “거지근성을 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고 민주노총을 세우는 과정에서 ILO 등 국제적인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받는 것에 그친다면 거지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보다 더 힘든 나라를 돕는 것으로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취지로 2010년 상반기 동안 타니아라는 학생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다 많은 학생들이 지속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학교를 건립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런 취지에서 ‘이주노동장학회’가 결성되었다.
‘베캄원정대’ 2500만원 후원
2010년 12월, 이주노동장학회는 진보 매체에 후원 광고를 내는 것으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했다. 이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행 모임 ‘베캄원정대’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작년 12월의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김영국 선생님이 선뜻 후원을 해주시겠다고 했다”는 석 국장의 말과는 달리 김영국씨는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고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국내 여행사들이 판매하는 패키지여행에 문제를 느끼고 대안적인 여행프로그램을 스스로 마련해 2003년부터 다른 교사들과 함께 여행하는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2006년에는 이 모임을 ‘베캄원정대’라 이름 짓고 여기서 나온 10% 내외의 수익금으로 베트남 중부산악지역에 전교조 명의의 학교를 건립하려 했다. 3학급 정도의 소규모 학교였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학교 건물을 신축하는데 드는 자금은 문제가 없었으나 상시적인 관리가 문제였다. 고민이 지속되는 동안 후원금은 쌓여갔다. 그런 와중에 방글라데시에 ‘희망학교’를 건립하겠다는 광고를 보게 된 것이다. 주변 교사들과 의논하고 여행참가자들에게 동의를 구한 뒤 ‘베캄원정대’의 이름으로 2011년 2월에 2000만원을, 8월에는 500만원을 후원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후원자들도 꾸준히 늘어났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외곽지역의 파키스탄 난민들을 돕고 있던 ‘명동 들불 장학회’의 가수 박준씨도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보다 넓은 범위의 후원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법인화를 추진, 지난 6월, ‘사단법인 이주노동희망센터’로 거듭났다. 노조 조합원이나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동참할 수 있도록 폭을 넓혔다.
마을 주민들 “대나무집을 지어서라도 학교 세우겠다”
“희망학교를 세우는 방글라데시 보리샬 꼴르노커띠 지역은 상습침수지역입니다. 주민들을 위한 대피소 겸 학교를 짓기 위해 튼튼한 기초를 다지느라 비용이 많이 들고 있습니다.” 김영국 이사의 말이다.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 지역에 3학급, 관리실 등 총 4칸, 1층의 건물을 지으려면 1000만원 정도의 비용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희망학교’는 수해를 견디게끔 철근구조물을 더해 5학급 1층 건물을 짓는 데 1억 4000여 만원이 든다고 했다.
다행히 학교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마을 주민인 압두섯닷 다카대학 전 교수가 600여 평을 기증하는 것으로 해결됐다. 그는 땅을 기증하면서 희망학교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올해 9월, 학교건물이 착공되자 700여 평을 추가로 기증했다. 이로써 건물뿐만 아니라 운동장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우르는 8개 학년 25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된다. 교장 1명, 수석교사 1명, 일반교사 3명, 관리교사 2명이 운영한다. 교사들은 보리샬 출신으로 임용해줄 것을 해당 교육청과 합의해 놓은 상태다. 그 외에도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그 지역 출신의 대졸 청년들이 다수 있다. 공무원, 의사 등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재능기부를 하겠다며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 공간에서 오전, 오후에는 아동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밤에는 주민들을 위한 야학을 진행할 예정이다. 문맹률이 70%에 달하는 주민들이 교육을 받으면 지역 문맹률을 낮추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마을 주민들의 반응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겁다”고 전한 석 국장은 사전 조사를 위해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에게 “우리는 한국의 노동자들이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1~2만원이라는 후원금은 뜻과 정성으로 모아 보내는 것”이라 전혔다. 이에 주민들은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고맙다”며 “학교를 세우는 일만 시작해 달라. 2012년까지의 완공은 대나무 집을 지어서라도 할 것”이라는 말을 손짓, 발짓을 더해 전했다는 후문이다.
주민들은 ‘보리샬 꼴르노커띠 학교설립위원회’를 구성하고 학교건립에 필요한 모든 현지행정 및 실무를 하고 있다. 석 국장이 “마숨씨가 이런 진행사항을 국제전화로 전해 왔다”고 했다. 학교설립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인 마숨씨는 현재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주로 다카에 머물면서 일을 하고 있지만 왕복 하루가 걸리는 꼴르노커띠에 시간이 나는 대로 들러 위원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한다.
만 원으로 한 달 학교공부에, 점심밥까지 해결
희망센터 측은 안정적 지원이 자리매김하면 이 모든 지원을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더불어 그들의 꿈은 방글라데시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네팔, 베트남 등 다른 동남아 국가로 그 영역을 확대할 것이다.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방글라데시 보리샬 지역 주민이 지역 발전과 연대에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서는 것”을 우선으로 꼽는다.

석 국장은 “번듯한 학교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 주민들과 서로 소통하고 교류, 그것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이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국의 이주노동자에게, 그들의 자국에 있는 주민과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국민에게까지도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 사업이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장기적인 목표로 설정해 놓고 하나씩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첫 걸음이라 했다. 그의 고민은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처우 개선부터 이들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확장되는 것까지 닿아 있었다.
카페, 진보 언론을 통한 후원인 모집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지만 특별히 김영국 이사가 본지 독자들에게 후원회원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베캄원정대는 상시적인 후원체가 아니다. 지금 절실한 것은 CMS회원이다. 만원의 돈으로 방글라데시의 한 학생이 한 달 동안 일하지 않고 온전히 학교공부만 할 수 있게 되는 데다가 점심밥까지 제공된다. 우리 만 명이 만 원 씩, 한 달에 1억원을 후원하면 보리샬 희망학교가 훨씬 더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제3세계에 학교를 세울 수 있다. 지금까지 모인 CMS후원회원은 100여 명 정도다.” 후원회원 가입을 권유하자마자 그는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지금은 교사 직무 연수에 참가한 교사들을 대상으로 홍보하러 가는 길”이라며 발걸음을 재촉해 교사 직무 연수장으로 향했다.
